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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헬레니즘 시대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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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성 ( 聖 ) 아우구스티누스에 이르는 약 700 년의 기간 은 아테네에서 회랍 문명이 절정에 이르렀던 시대와는 그 성격이 매우 관 이하였다. 아테네는 B. C. 5 세기에 페리클레스 치하에서 예술적 및 정치적으로 장관 ( 社觀 )의 극을 이루었다. 그리고 설혹 아테네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그 지적 절정에 도달하였다 할지라도, 이들 두 사람은 역시 그들의 바로 직전에 달성된 이러한 업적을 쫓아 희망에 찬 사상을 품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성격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그 여파로 많은 파멸을 가져왔다. 그것은 스파 르타의 승리였다기보다 아테네와 전 회랍의 패망이었다. 회랍의 도시 국가 는 영영 사라져 버렸고, 한때 그 안에 충만해 있었던 희망과 이상은 그와 더불어 시들어 갔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한 해 앞서 세 상을 떠났다. 그리고 비록 그의 제국이 분리하여 이룩된 세 큰 나라들이 각기 한 세기 동안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점차로 로마의 힘은 지중해 세계를 건너 팽창해 나아가 영토를 차례차례로 그 강대한 통치 밑에 예속시키기 시작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아테네 사람들에 관해서 독일 의 역사가 몸젠 ( Theodor Mommsen, 1817 ~ 1903 ) 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 그들도 역시 무력하였으며, 아티카 ( 즉 아테네 )의 시와 예술의 후광을 제외하고는 거의 어떠한 것도 같은 종류의 수많은 군소 도시들 가운데에서 이 들 찬란한 과거의 대표자로 하여금 두각을 나타나게 할 만한 것은 없었 다. " 그러나 회랍의 영향은 로마의 문화와 사상을 지배하였다. 회랍은 군사 적 · 정치적으로는 패배하였을지라도 여전히 로마에 대해서는 스승이었다.

 

그러나 희랍 사상은 거대한 로마 영토의 지적 생활을 형성해 가는 도중에 새로운 곳에 맞게 크게 변형되었다. 역사가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 망 이전과 이후 두 시대의 문화의 성질을 특징지을 수 있는 형용사가 필요 하다. 그들은 보통 전자를 ' 회랍의 ( Hdlknic )'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 헬레니즘의 ( Hdlishisbc )'라고 부르고 있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 원천을 회랍 문 화에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회람 문화와 같은 씩씩한 기백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은 엄청난 실제적 문제들 때문에 어딘지 위축해 버렸고, 성취의 즐거움보다도 오히려 불행의 방지를 회구 하였던 것처럼 보인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은 소위 ' 신경의 탈락' 이라고 불린 말에 의 해 단적으로 표현될 수가 있다. 회랍적 로마 시대에는 법제 분야를 제외하 고 희랍 시대보다 사상의 독창성이 적었다. 창조적 사유 대신에 박식 ( 博識 ) 이 존중되었다. 이 시대에는 주로 빌려온 사상을 제 것으로 만들고, 절충적 종합을 이룩하며, 선행 철학자들에 대한 해박한 주석을 꾸미는 데 철학적 성찰을 기울인 사람들의 이름을 많이 볼 수가 있다. 헬레니즘 시대에 뚜렷 한 발전을 보인 철학들은 모두가 그 바탕에 염세적인 경향 - 비록 염세 적인 경향이 나타난 형식들은 다양하며 종종 또 서로 상반되기도 하였지만 - 을 나타내고 있다.

 

철학자들은 세속적인 일을 제어해 갈 수 있다는 자 신을 포기하고, 고난으로부터의 조용한 피난처 내지는 보다 나은 왕국에로 외 탈출로를 찾았다. 그들은 인간이 숙명적으로 타고난 유한성을 탄식하고 싸움 없는 평화, 공격 없는 안전, 혹은 어떤 초자연적 근원으로부터의 구 원을 갈망하였다. 그러므로 헬레니즘의 철학은 도덕적 내지 어느 정도 종교적 문제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는 자연계에 대한 지식이 안심입명 ( 安心立命 )에 이르는 준비가 되는 한에 있어서를 제외하고는, 자연계에 관한 관심이 쇠퇴되고 있음을 엿볼 수가 있다. 그것은 ' 처세'에 관한 논담, 그것도 혼 허는 오히려 맥 빠진 논담으로 화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때로 헬레니 즘 철학은 용인된 권위로서, 심지어는 계시로서까지 추앙을 받는 일련의 교리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각 교리를 중심으로 같은 정신을 품은 사 람들끼리 모여 종파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각 종파는 확실한 안심입명의 기술로서 각기 교리를 반복하고 전달하곤 하였다. 이 일련의 교리에의 엄 격한 순종으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구원의 희망을 위태롭게 하는 것으로 여 겨졌던 것이 보통이다. 철학은 여러 ' 학과' 또는 종파의 신앙의 고백으로 화하였다. 적대하는 학과들은 사심 없는 진리 탐구보다도 오히려 서로 논 박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신기한 신념을 제시한다는 것은 그 당시에 는 온당치 못한 일이었고, 자신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 뚜렷한 덕이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사상적으로 특기할 만한 학파가 다섯 있었다. 기독 교, 즉 원시적 형태의 기독교도 이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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